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군대 == ||[[파일:main-qimg-97ad5746ae341927bcce417fab4032ba.jpg|height=300]]||[[파일:main-qimg-3c03b0ac38fe4ee08e16666a4b2d9720-lq.jpg|height=300]]|| 응우옌 왕조가 세워진 직후인 1802년, 베트남의 군사는 대략 15만 명의 지방군, 그리고 1만 2,000여 명의 중앙군으로 이루어져 총 16만 2,000여 명 정도의 규모였다.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평화기가 도래하면서 군대의 규모는 점점 작아졌고, [[민망 황제]]의 시기에는 지방 상비군의 수가 5만 명에서 6만 명 수준까지 내려갔다. 그렇게 베트남의 군대는 민망 황제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세가 유지되는 듯 싶었으나, 민망 황제가 승하하고 이후 유약한 황제들이 연이어 들어서고 서구 열강들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빠른 속도로 후진화된다. [[뜨득 황제]]의 재위기에 베트남군은 44,000여 명 수준으로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제대로 훈련되어 있는 병사의 수도 전체 군대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그 질 역시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 뜨득 황제 이후 베트남이 점차 프랑스에 종속되어가면서 응우옌 왕조의 군대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베트남 군대가 아닌 프랑스인들이 대신 베트남의 국방과 치안을 책임졌다. 베트남의 군사체계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군은 황제가 친히 지휘하던 수도의 정예군으로, 총 12,000여 명의 규모로 편성되었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건국한 응우옌 왕조였던 만큼, 응우옌 왕조는 이미 건국할 때부터 대대적인 서양식 화기를 도입해나가고 있었고 때문에 중앙군은 모두 서양식 라이플이나 [[머스켓]]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병사들은 검은색 군복을 입었으며, 군복에는 꽃 장식이 되어 있었으며 배 쪽 부분에는 자신의 부대를 가리키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머리에는 베트남 전통의 삼각뿔 모양의 고깔 모자를 썼고, 이 모자는 보통 깔끔하게 다듬은 삼나무로 만들어 가벼웠다. 또한 중앙군에게는 흰색 신발이 지급되었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맨발로 다니거나 조잡한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지방군의 규모는 자롱 황제 시기에 약 15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달했다가, 평화가 정착된 이후 꾸준히 규모가 감소하여 민망 황제 시기에 36,000여 명에서 6만 명 수준까지 하락했다. [[티에우찌 황제]]와 [[뜨득 황제]]의 시기 동안 꾸준하게 규모와 질 모두가 떨어진 지방군은 19세기 후반에는 규모가 3만 명 정도에 머물렀고, 대부분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중앙군처럼 라이플이나 총으로 무장한 인원은 극히 드물었고, 압도적 다수가 창이나 칼 등 [[냉병기]]들만을 주로 썼다. 지방군은 전군, 중군, 좌군, 우군, 후군 이렇게 5개로 나누어졌다. 민망 황제 시기 일반적인 지방군에 속한 병사들은 한 달에 1전, 혹은 500푼 정도의 월급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의 재정이 파탄나면서 이 정도의 월급을 실제로 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검은색 군복을 입었던 중앙군과는 달리 붉은색 군복을 입고 다녔고, 지휘관들은 무복이 아닌 비단으로 만든 흑색 관복을 걸치고 다녔다. 특별한 행사나 예식이 있을 때에는 예식용 녹색 관복을 입기도 했다. 관복에는 동물이 그려진 [[흉배]]가 붙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그 사람의 계급을 판단할 수 있었다.[* [[기린(상상의 동물)|기린]]이 그려진 흉배가 제일 높은 계급이었고, 그 다음으로 [[사자]], [[호랑이]], [[흑표범]], [[곰]], [[표범]], [[해마]], [[코뿔소]] 순이었다.] 응우옌 왕조는 해군도 운용했다. 당시 중국 남부와 동남아에 창궐하던 해적들로부터 동부 해안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해군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1837년 J.H 무어가 사업상 베트남을 찾은 후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베트남에는 총 50여 척의 [[스쿠너]]로 이루어진 함대가 있었으며 80여 척의 [[슬루프]], 100여 척의 전통형 전선들, 80~100여 개의 노가 달린 [[갤리선]] 300척, 40~80여 개의 노가 달린 갤리선 500척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황제는 200여 척의 갤리선을 따로 만들어 황제 직속 해군으로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갤리선들은 모두 유럽과 베트남 양식을 혼합하여 만들어 양쪽에 14문의 대포들을 설치했다고. 이정도로 베트남은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최강의 해양대국이었고, 1819년에 사이공을 방문한 미국 병사는 베트남 해군의 위상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가면서 해군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육상에서 하도 많이 반란이 일어나면서 조정의 관심은 해군이 아닌 육군으로 옮겨갔고, 해군이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해군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해버렸다. 대부분의 전선들이 무너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상선으로 용도가 전환되었으며 한때 꽤나 쓸만했던 해양 기술과 항해술은 타 아시아 국가들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1880년 경의 베트남 해군은 7척의 [[초계함]], 300척의 [[정크선]], 2척의 오래된 영국제 [[증기선]] 정도만을 겨우 운용하는 수준으로 그 질과 규모가 모두 급추락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마저도 모두 프랑스 해군에 흡수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